청석의 생각/청석의 칼럼

현대 철학의 위기와 상생(相生) 원리

청석tr 2023. 3. 29. 10:47

현대 철학의 위기와 상생(相生) 원리

청석tr 김성일

 

(1) 인간의 본질과 현대 철학의 위기

 

인류가 의식적으로 인간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5세기 경부터였다. 서양에서는 소크라테스, 인도에서는 석가, 중국에서는 孔子가 거의 같은 시기에 나타나서 인간 본질의 문제를 생각하고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인류의 문화는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인간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질문하는 자가 아주 절박한 상황에 처하여 있을 때 발생한다. 나는 무엇이며,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러한 고통을 당해야만 하느냐고 묻게 된다.

 우리는 오늘날 어느 때보다 더 극심한 위기감과  불안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지나간 어떤 시대보다도 풍요한 물질의 혜택을 받고 살면서도 절박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전전 긍긍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소외, 인명경시, 인간성 상실이니 하는 처절한 낱말들을 항시 듣고 있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연료, 식량 등 중요 자원의 고갈, 원상회복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물, , 공기의 오염과 그 결과로 생긴 생태계의 이변과 자연 질서의 파괴, 그리고 끊임없는 전쟁의 위협과 군비 경쟁,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정치적인 인권 탄압과, 경제적인 수탈과 착취, 그 뿐만 아니라 현대 산업사회에 있어서 대량 생산 체제의 역작용이 가져온 자기 소외 현상들은 마침내 개성, 창의성, 자발성, 자기반성 등의 인간의 기본적인 능력을 약탈함으로써 인간을 무 사려한 얼빠진 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도대체 인간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또한 현대사회는 철학이 없다는 말을 흔히 듣게 된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다르게 들린다. 한편으로는 서양의 고대와 중세 또 근세에 있었던 것처럼 대체계(大體系)를 갖추어, 강력하고 위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철학을 현대에 와서 찾아 볼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는 역설적으로 너무나도 많은 철학사조(哲學思潮)들이 중구난방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서 사람들은 갈피를 잡을 수 없기 때문에 마치 현대는 철학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질서가 견고했던 시대에서는 철학은 모든 학문, 과학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었고 중심 윈리였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는 이러한 본연의 모습을 갖춘 철학을 찾아볼 수 없다. 참으로 많은 시도가 있었으나 어떤 철학의 경향도 우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한국 相生原理의 우주관, 인간관, 윤리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잠시나마 강력한 영향을 끼친 철학으로 유물 변증법, 논리 실증주의, 현상학(現象學), 실존철학 등이 지역에 따라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 공산당의 몰락과 함께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고하였으며 현대의 논리 실증주의(論理實證主義)도 인간성을 메마르게 하였으며 실존철학도 인간에게 허무와 권태를 던져주었다. 이러한 사조(思潮)들도 모든 철학의 문제들을 총괄하고 있는 중심 원리가 될 수 없었고, 또 더군다나 제1원리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정체성을 잃고 우왕좌왕하다가 급기야는 불안과 초조 속에 허덕이게 되었다.

 

걸프 전쟁에 승리한 것도 예수님 덕택이고, 자기 아들이 일류 대학에 합격한 것도 부처님의 은덕이라고 하니 남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나, 극락에 가기 위하여 현세의 욕망을 버리라고 가르치신 석가모니가 다시 돌아온다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겠는가? 교회의 건물은 하늘 높이 올라가고, 정치가들은 호텔에서 고급 양주를 마시면서 거리를 헤매는 실업자와 거지들을 외면하고 자기들이 마치 국가와 민족의 지도자인체 하고, 인류의 구세주인 것처럼 뽐내고 있으니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는 굶주리면서 한쪽에는 원자탄과 총칼을 쌓아 놓고, 또 한편으로는 세계 평화와 인류의 공생을 외치고 있으니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이제 철학은 우리의 이러한 현실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인가를 묻는 자는 곧 자기모순에 빠지게 됨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그는 묻는 자이면서 동시에 대답하는 자이므로 그가 그 자신에게 내리는 대답은 불충분할 수밖에 없으며 다시금 문제되는 것을 피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를 안다는 것은 바로 자기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에 관한 제 관점에 관하여 철학자들은 인간을 어떻게 보아 왔는가를 살펴 볼 필요성이 있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역사상 여러 가지의 대답들이 나오고, 심지어 그 대답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일지라도 그 해답들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해명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밝혀주는 것임은 틀림없으므로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철학적 인간학과 상생원리의  비교 고찰을 통하여 문제의 해결 방안에 접근하고자 한다.

 

(2) 인간의 본성에 관한 제 관점

 

 우리가 사회의 목적을 탐구하는 경우에도 궁극에 있어서는 인간 존재의 의의, 즉 인간 존재의 근원과 그 목적을 해명해야 함에 있다. 이리하여 인간이란 어떠한 존재인가?라고 하는 문제는 사회생활의 본성이나 그 원리를 바르게 파악하고자 할 때 사회 철학이 명백하고 의문의 여지가 없는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기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공동생활의 원리, 즉 사회의 질서의 원리를 탐구하고자 할 때 인간의 문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정당화된다고 하더라도 논자들의 관점의 차이에 따라서 가각의 인간관 내지 인간론은 매우 다양하다.

 

 <비엔나>대학의 자연법 윤리학자 메스너<Johannes Messner)의 저술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경험적 인간학인간은 육체적으로 동물에 매우 가깝지마는 그런데도 불구하고 동물학적 의미에 있어서도 유일한 종()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 종족은 무제한으로 다른 종족과 혼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지적(知的) ()이 부여되어 있다. 즉 인간의 마음은 그로 하여금 이상적 동물로서 자기 결정적 혹은 자유의사를 부여받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인간학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인간은 그의 영적 본성으로 말미암아 사회적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실질에 있어서 물질이고 혹은 영적인 것으로서 어느 하나가 다른 것으로 바꾸어질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이 양자는 합일하여 본질적인 단일자로서의 인간의 본성을 형성하게 되고, 이 때 영혼은 인간 본성 특유의 행위의 원리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상호 간의 보완을 통해서만이 그의 합리적 본성 속에 심어져 있는 인간 본질의 완전한 발전에 이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셋째, 기독교적 인간관경험적, 형이상학적 인간학에 의해서 밝혀진 여러 사실에 기초하면서도 인간의 혼의 영적 본성과 그 불멸성에 관한 궁극적인 증거는 계시를 통해서 얻는다. 신이 인

간의 본성을 지니고 인간 세상에 내려와서 창조주가 인간의 본성 속에 새겨둔 본원적 사실, 즉 인간의 가치는 지상의 어떠한 가치보다도 우월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이건 국가이건, 국민이든 종족이든 또는 전 세계이든 결코 인간의 품위를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속죄 주 그리스도가 신의 아들로서 증명한 것이라고 한다.

 

 넷째, 자연주의적 인간관인간은 유기적 물질이고, 그 물질이 발전한 하나의 산물로서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합리주의적 인간관과 유물론적 인간관으로 발전되었다. 합리주의적 인간관은 비인격적, 정복지향적, 개인주의적, 평등주의적 인간관이다.

  다섯째, 유물론적(唯物論的) 인간관레닌(Lenin)에 의하면 정신적인 것, 의식적인 것 등등은 고도로 발달된 물질의 최고의 산물이고, 인간의 뇌수라고 불려지는 복잡하게 뒤얽힌 물질의 단편의 기능이라고 한다.

 

 여섯째, 관념론적 인간관유물론적 일원론이 인간 정신을 물질의 진화에 있어서 하나의 계기라고 보는 데 반하여 관념론적 일원론은 인간을 궁극적으로 정신적인 것의 발전된 하나의 현시물이라고 한다. 국가는 정신의 자기 발전에 있어서의 보다 고차의 형태라고 이해하기 때문에 이태리의 쟝띠(Gentile)에 의해서 정식화되고 파시즘(fascism)에 의해 채택된 국가와 개인의 동일화라고 하는 전체주의 원리에 도달하게 된다.

 

 일곱째, 유가(儒家)적 인간관孔子 祖宗으로 하는 유가의 정통은 孟子에서 단절되었다가 二程子에 의해서 부활되고, 다시 朱子에 의하여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만물은 天命에 의해서 타고난 天性을 가지고 있고 (天命之謂性), 따라서 만물은 제각기 자연의 일부요, 소우주이다. 天地人 3, 즉 하늘과 땅 사이에 만물이 있는데 오직 사람만을 특히 지칭한 것은 사람으로서 만물을 대표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특히 맹자는 인간은 만물의 영장(靈長)으로서  天性을 가장 완벽하게 부여받은 전형적인 존재자이므로 만물의 이치가 빠짐없이 구비되어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인생의 사명은 자신의 원형을 회복하는 후기초(後期初)의 노력을 통하여 天道에 귀일함으로서 자연 질서, 즉 천지조화에 기여하고 만물과의 조화로운 化育을 도모하는 것이다.

 

환언하면 인간은 타고난 자연의 본성을 회복하고 발휘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보람되고 값지게 수행할 뿐만 아니라 만물의 본성을 헤아려 만물이 만물되게 하는 (平天下) 사명을 지닌 존재(君子)라는 것이다. 합리주의적 인간관이 우주의 Logos를 말하는 것이다. 자연에 있어서의 와 인간에 있어서의 을 논하는 유가의 인간학은 공통성이 있다. 그리고 天道 人道 合一, 자연에의 순응(盡性知命)을 강조하는 유가(儒家)의 인간관은 이성(理性)의 합법칙성(合法則性)을 강조하고, 자유의지와 자유 선택을 부인하는 합리주의적 인간관의 비인격적 인간관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양자 모두 자연주의적이다. 다만 합리주의적 인간관이 정복 지향적 인간관이었는데 반하여 유가의 인간관이 시종일관 자연에의 순응 조화를 강조하는 것과 대조된다.

 

 여덟째, 불가적(佛家的) 인간관(생명관) 佛家는 생명 곧 생명계에 있는 有情物 衆生이라고 하는바 생명의 기원을 因緣說에 의거하여 衆生   이 화합하여 했다.(衆生和合生),   은 그 생명을 구성하는 요소들로서 오온(五蘊)  . . . . 을 든다. (물질적인 요인으로서 ), (감각작용), (지각, 사고작용), (의지적 행동작용), (인식 능력)을 뜻하며 정신적인 면이다.

 

 따라서 불가(佛家)의 인간관은   즉 물질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인이 화합하여 생한 것으로 그 존재 가치는 절대적이라고 한다.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생명은 다 같이 생존권과 존엄성이 동등하여 어느 생명이 다른 생명에 의하여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不殺生戒를 근본신조인 五戒의 제 일 계명으로 확정한 것이다. 생명의 존엄성, 가치성을 자각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는 모든 생명을 보호할 사명이 있고,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하는 것을 지상적 사명으로 하였다. 그것이 곧 , 보살의 慈悲이다. 일방으로 인간의 知正覺(올바른 깨달음)의 강조는 자연의 법칙에의 합일과 통한다는 의미에서 불교적 인간관도 합리적 인간관과 공통되는 비인격적 인간관이요, 따라서 자연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3) 철학적 인간학의 의미

 

 인간의 본질과 현대 철학의 위기를 규명하고 극복하기 위하여 인간의 본성에 관한 제 관점을 고찰하였다. 인간의 본질과 과제를 다루는 것이 오늘 날 철학의 중요한 테마가 되고 있다고 한다면 철학적 인간학은 최근의 철학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고대 희랍에서는 철학은 자연 과학과 정신과학을 하나로 통일하여 보았고 인간을 전 우주의 중심체로, 아니 만물의 척도로까지 보았다. 서양 중세에서는 인간은 신의 모상으로 이해되었을 뿐 독자적이며 고유한 인간에 대한 연구가 없었다. 독일의 칸트(Kant, I.)이래로 현대철학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인간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M. Landman은 철학적 인간학이 1920년대의 소위 인간학적인 전환을 유발시키는 준비 단계로 現象學, 生哲學  形而上學의 새로운 재건 가능성을 열거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 인간학의 원천을 어떤 사상가의 관심에서 살펴 볼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가 일반적으로 느끼고 있는 필연성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자연과학의 진화론과 이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철학의 자연주의는 인간 본질에 대하여 만족할만한 해답을 주지 못했다.

 

이래의 철학의 관념주의도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를 위시하여 그의 뒤를 이은 실존주의 철학의 반발을 야기시켰다. 20세기 실존철학은 관념론이 인간을 일반화하는 인간 본질의 파악에 철저한 반기를 들었으며 무엇보다도 인간의 본질성을 이미 완성된 것으로 고착시키는 것에 대하여 비난을 하였다. 인간 현 존재의 근본을 불안으로 보는 실존철학과 그 밖의 원인들로 종교의 근본이, 특히 기독교의 인간관이 크게 동요를 받게 되었다.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은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인간은 무엇이며 존재에서 그의 위치는 무엇인가? 라는 인간의 문제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 보려고 시도한다.

 

 그러므로 인간학은 오늘날까지의 신학적, 철학적, 자연과학적 전통에 구속을 받지 않고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인간의 문제를 풀어보려고 한다. 그러면 대관절 무엇이 현대의 철학적 인간 창조된 학이란 말인가? 기본이 되는 인간 구조의 전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며, 항상 개방되어 있으면서도 생물학, 의학, 심리학, 민속지학, 사회학 등의 개별과학을 넘어서 독자적인 입장을 추구한다. 이른바 인간에 관한 개별 과학들은 사람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이 되는 지식을 갖고 있거나, 인간이란 자명한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4) 相生原理의 人間觀

 

상기와 같이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도 결국 인간 중심적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상생원리의 인간관은 무엇인가? 상생원리에서는 인간은 우주 구성원으로써의 우주 가족으로 보고 살아도 우주 안에서 살고, 죽어도 우주 안에 있을 것이니 싫으나 좋으나 우주 안에서 살고, 죽어도 우주 안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활 법칙이 따로 있을 리가 없고 우주의 법칙이 곧 인간 생활의 법칙과 동일하다고 본다. 여기서 우주법칙이란 순서, 시간, 장소로 3분하며, 순서(順序)법칙에는 先授性, 先導性, 先推性이 있으며, 시간(時間)법칙에는 恒授性, 恒導性, 恒推性이 있고, 장소(場所)법칙에는 充授性, 充引性, 充推性이 있다.

  인간의 구조론(構造論)에서는 인간이 왜 태어났으며,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밝혀주고 있다 상생원리에서 인간의 구조는 마음, 정신, ()으로 3분하고 마음은 始發性, 促進性, 연속성, 정신은 순서성, 조절성, 연결성, 몸은 표현성, 실현성, 결과성으로 표현된다.

  또한 상생원리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목적, 이념, 생리로 3분하고 목적은 恒動性 恒變性, 恒續性, 이념은 縱不絶, 橫不離, 種不滅, 生理 不息性, 不同性, 不無性으로 구성되며 인간에게는 3대 특성과 3대 사명이 주어져 있다고 본다. 여기서 3대 특성이란 미완성적 존재, 각성(覺醒)적 존재, 종교적 존재, 3대 사명은 윤리생활, 지혜생활, 과학생활의 교육사명을 일컫는다.

 

  상생원리의 인간관을 요약하면 인간은 본성, 법칙, 구조로 구성된다는 우주 원리에 귀일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우주 안에는 독생자도 없고 독존자도 없으며, 독재자도 없고 지배자도 없다. 그러면서도 31체라는 말이 있듯이 하나는 3요소가 합쳐져야 하나의 구실을 하고 그 하나는 다시 필요한 셋이 합쳐서 합심하여야만 하나가 성사되고, 그 성사들이 모여서 서로 연관적 관계 작용을 할 때, 사회가 형성되고 나아가서 이 무변광대한 자연계와 우주가 운행되어 우주의 목적인 永生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및 만유는 피조물이 아니고 필연적 존재이다. 이 세상에는 각양각색의 존재와 사건이 있으나 그것들은 모두 다 에서 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3요소가 합쳐져서 생겨나서 하나의 구실을 한다. 즉 하나는 깊이와 넓이와 두께가 있어야 하나가 되고, 원인, 과정, 결과가 있어야 하나의 사건이 되듯이 상, , 하가 있어야 그 계층이 분명해지고, 좌우에는 중심이 있어야 그 위치가 설정되며, 시작이 있으면 진행 과정이 있어야 끝이 있으며 너와 내가 만나서 우리가 되어야 조화가 이룩되어 만사가 성사된다.

  하나의 국가도 국토가 있고 국민이 있고 국법이 있어야 한 국가가 형성되고 그 국법에는 입법, 행정, 사법이 있어야 그 국가가 유지되듯이 이 우주 안의 모든 존재와 사건은 가시적으로 는 하나로 보이나, 사실은 그 속에 성질인 무형 요소 둘과 인 유형 요소 하나가 합쳐져서 31체 작업을 함으로써 존재 역할을 하며, 그 하나도 서로 필요한 3자가 협동 작업을 해야만 그 존재의 생명이 유지되며 사건도 해결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그 속에 , ,  3요소가 구비되어야만 하나로 태어나고, 그 하나는 다시 3자인 나, , 우리를 만나야만 그 생명 작용과 成事작용이 가능하다는 뜻이어서 인간의 구조도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셋이 합쳐져야 하나의 구실을 한다는 그 인간 구조의 3요소는 과연 무엇인가의 해명이 요구된다. 그러나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 구조의 3요소가 분명하게 해명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른 것은 지극히 안타까운 현상이다.

 인간의 구조란 인간에게 필요한 능력을 파생하게 하여 인간의 , , 을 표출하게 하는 3(三元) 요소 구성을 의미하며,  3원 요소는 전술한 우주관에서 우주의 구조는 , ,  3원 요소로 구성되었으나, 인간 구조에는 마음, 정신, 육신 3원 요소로 구성되며 마음은 의 역할을 하며, 육신은 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인간이 혼돈된 사회 속에서 방황하는 것은 자연계가 모두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이 마치 만물의 영장으로 자처하고 人乃天, 天地人 3하면서 인간이 우주와 대등한 자리에 앉고 나는 신의 자리에 앉고, 내 자리에는 교만과 아집이 자리잡고 들어 앉아 있어, 자기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까닭이다. 실은 인간 외의 만유는 평생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태어나서 알고 살다가 알고 죽어가나 인간은 아무런 준비 없이 모르고 태어나서 배우며 살다가 깨닫고 죽어가야 하는 미완성으로 태어난 데서 풀리지 않는 모든 인간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인간은 본래부터 우주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인간 본성인 목적, 이념, 생리와 질서 법칙인 3 授受법칙과 구조는 우주관의 그것과 한 치도 어김없이 동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상생원리의 인간관이다. 그러므로 상생원리는 인간이 미완성자로 태어났음이 분명한 이상 완성자로 거듭 태어나지 않고는 우주 구성원의 일원으로써의 제 구실을 못할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싫으나 좋으나 인간이 미완성자로 태어났음을 인정하고 인간 완성을 위하여 정성을 다 하는 것이 인생의 참 모습이며, 인간 문제 해결의 핵심이며, 지름길이다.

 

  그러므로 인간 미완성을 해결하기 위하여 3대 교육 사명을 다 하는 것이 3대 특성을 지닌 인간 본성이 무엇이며,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깨닫고 자기완성을 성취하는 인생 노정이며 인간 생활의 최고의 극치이다.  3대 교육 사명을 다 할 때 미완성이 성숙되어 만유와의 관계 질서에 조화롭게 적응된다. 이 때 우주 가족의 일원으로서 자격이 부여되어 자연과 더불어 사는 세계에서 너도 살고 나도 살 수 있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살아서 후회 없는 죽음 길이 열린다. 결국 인간의 목적이나 사명은 우주를 영생시키는데 일괄적으로 귀착된다.

 전체와 우주는 영생하여도 개체는 생사가 있을 뿐 영생하지 못하며, , ,  31체가 되어 우주 구성원이 될 때 살아남는다. , , 우리가 합심할 때 창조가 이루어진다. 모든 창조는 혼자서는 불가능하므로 상징체인 신이 인간 완성을 유도한다. 인간은 상징체인 신성(神性)을 추구한다는 것이 상생 원리 이론이다.

 

(5) 맺는 말

 오늘날 인간이 혼돈된 사회 속에서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미로에서 방황하는 것은 현대 철학의 위기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확고한 사상 체계가 결여되고 사상의 혼미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교만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다양한 관점들이 제 각기 목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인간의 문제에 대한 비판을 전개했을 뿐 해결 방안을 찾지 못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철학적 인간학의 등장으로 분별을 잃어버린 정치가, 사업가, 의사 등의 행위에 어떤 제한을 하는 것은 타당한 것이었고, 장구한 세월동안 인간의 특수 위치를 보장해 주었던 신학적인 세계관은 오늘날 파괴되어 버렸고, 인간은 절대자 일방에로의 지적 접근도 상실했다는 데에 인간의 위기가 있다. 그러므로 철학적 인간학도 결국 인간 중심적이었다

서울특별시 연구회 편, <민주시민교육> 15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