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선에서 청춘을 보내고
박정희 군사 독재정권의 울타리였던 정보기관원들이 활개치던 시절이었다. 1965년 12월 나는 학교를 중퇴하고 39사단으로 징집되었고 1966년 1월27일 육군 이등병 병기 탄약운반병으로 병기학교를 거쳐 ○○사단 977포병대대로 배치되었다. 한탄강, 임진강을 건너 영하 20도의 전방부대로 발령났다.
육군 병기학교에서 교육기간중 고참병들의 횡포는 대단하였다.
점호가 끝나고 밤 10시에 취침하면 새벽 01시까지 고참 병사들이 와서 원산폭격, 한강 철교, 야전삽으로 구타하기 등 이루 말 할 수 없는 횡포를 부렸다. 술 값을 걷어주면 기압이 부드러워지기도 했다.
훈련소를 졸업할 때 모두들 가족들이 찰떡을 해 와서 즐겼지만 고아 출신인 나에게는 아무도 찾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병기학교에 와서 이렇게 비참한 지옥 생활을 감수해야하니 나의 가슴 속에는 불타는 복수심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부대 배치후에도 졸병 시절 고참병들로부터 많이 얻어맞았다. R.O.T.C 출신이건 육군사관학교 출신이건 젊은 소대장(육군 소위)들은 최전방에 배치된 병사들의 고독한 마음을 잘 헤아려주지 못했다. 나는 병역의 의무를 다 하기 위하여 국민의 군대로서 군에 온 것인데 부당하게 구타당하면서 누구의 노예가 되기 위하여 군대에 온 것이 아니다. 돈 많고 빽 있고 사회적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나 자식들 중에 과연 최전방에서 군대 생활을 하는 자가 있는지? 병역의 의무나 제대로 하였는지 묻고 싶다. 6・25 전쟁시 이름 모르는 계곡에서 녹쓴 철모 밑에 숨져간 호국 영령들은 과연 누구였던가? 가난한 농민의 자식이 아니였던가? 나는 갑자기 가슴 속에 증오와 복수심이 불타고 있었다. 그런데 복수의 대상을 누구로 하느냐가 연구 대상이었다.
현재 나는 젊음이 있기 때문에 참고 견디는 것이 일차적 과제였다.
말단 사병생활은 도저히 나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았다.
최전방에서 탄약운반병을 그만두고 1967년 육군 일등병으로 육군 간부후보생을 지원하였다. 사병으로 제대하고 고향에 돌아가봤자 밥 한 그릇 줄 사람도 없고, 잠 잘 곳도 없고 대학 생활을 계속한다는 보장이 없는 나는 고민 끝에 육군 장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육군보병학교, 육군포병학교, 육군정훈학교를 수료하고 1968년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최전방 GOP부대 DMZ에서 청춘을 보내고 육군 대위로 임관하고 정훈 장교로 근무하던 중 1973년 11월 30일 군대 생활을 청산하고 대학에 복학하여 젊은이들과 함께 1976년 대학을 졸업하였다.
내가 군대에서 제대하고 8년만에 대학에 복학하여 만학을 하다보니 군인 퇴직연금 몇 푼으로 서대문구 연희동 산5번지 한전 철탑 밑에 있는 판자집 단칸방에서 월세를 살았다.
학비도 모자라고 두 아들의 간식비 조차도 없고 보니 아이들과 아내의 얼굴은 황달병 환자처럼 누렇게 부어 있었다.
겨울에 물이 없어 새벽 04시에 우물가에 뜨레박으로 물을 길으러 가니 물은 말라버리고 동네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고 있었다. 낮에 구청에서 산동네에 급수차가 도착하니 서로 물을 먼저 받겠다고 새치기하고 전쟁터와 같았다.
간간히 가뭄에 콩나듯이 장모님이 보내주는 쌀자루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처가댁은 부자인데도 무관심하니 참다못해 아내는 등록금 한 번만 보태달라고 구걸하고 애원하였다고 한다.
아내는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길에 나가 연대 앞 굴다리 밑에 가마니를 깔고 신발을 팔다가 도로 교통법으로 압수당했다. 서대문구청 근처 악취가 풍기는 개천가 판자집 단칸방에 월세를 얻어 이사하였는데 옆집에 불이 나서 소방차가 출동하였다. 그 집의 어린 아이를 구출하려고 군인 정신을 발휘하여 머리카락을 약간 태우면서 뛰어 들어가니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대피하였다고 했다. 화재가 진화된 후 귀중품이 없어졌다며 싸가지 없는 옆집 주인아줌마가 나를 도둑놈 취급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나중에 밝혀졌는데 그 집에 자취하는 여대생이 훔쳐갔다는 것이다. 돈도 없고 빽도 없는 가난뱅이는 사람 취급을 못받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막가파와 조직 폭력배가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국제 마피아단에 가입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군대에서 나는 왜 청춘을 보냈을까? 육군 중위 때 결혼하여 최전방을 돌아다니면서 나의 아내는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지 모른다. 결혼후 39년 동안 월세, 전세 이삿짐을 18회나 쌋으니 이삿짐 싸는데 도사가 되었다.
결혼 때 구입한 냉장고와 세탁기는 녹이 쓸고 밑받침이 다 부식되어 20년만에 교환하니 집사람은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기뻐하였다.
“아버지! 아버지는 결혼한지 39년이 되었는데 사기꾼, 도둑놈, 놈팽이도 타고 다니는 그렇게 흔해빠진 승용차 한 대도 없으세요?”아들이 물었다. 아들아! 우리나라는 기름 한 방울도 생산되지 않는데 월급쟁이가 무슨 놈의 자가용이냐? 아버지는 부모님이 주신 튼튼한 다리가 있으며 그것도 군대생활 8년 동안 더욱 튼튼하게 훈련된 두 개의 정상적인 다리가 있으니 가장 좋은 11호차가 아버지의 자가용이란다… 그뿐만 아니라 지하철, 버스가 얼마나 많으냐? 우리나라는 행복한 나라야… 자가용이 없으니 남보다 더욱 부지런하고 걸어다니니 얼마나 건강하니?
아버지는 이제 60회갑이 지났지만 시력이 1.0에 안경도 없이 신문도 읽고, 직장에서 퇴근하면 수시로 뒷산에 올라가 산책을 즐기며 거짓말 할 줄 모르는 나무와 바위와 대화를 나누며 하산할 때 재래시장에 가서 막걸리에 두부 김치를 먹으니 그것이 보약이 아니더냐? 아들아…
정년 퇴직후에도 집안 일 돌보기, 손녀 봐주기, 무릎이 불편하신 어머니 도와주기, 도봉산에 산책하기, 매일 컴퓨터로 카페와 플래닛의 내용을 손질하며, 근면・검소・절약의 자본주의 정신을 실천하잖아…
정규직이 월급 올려달라고 매일같이 데모하니 비정규직이나 실업자는 어찌 살아가겠니? 세계적으로 경제생활이 어려운데 모두들 사장님 행세만 하려면 기업이 망하게 된다.
요즘 세상은 결혼할 때 아파트나 자가용이 없으면 여성들이 청혼도 하지 않으며 남자를 병신 취급한다고 한다. TV연속극을 보면 모두 사장이고 재벌이고 고급 아파트에서 고급 외재 가구를 갖춘 사람들이 사랑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돈도 없고 학벌도 없는 총각들은 결혼도 못하고 늙어가고 있다. 열심히 살아가려는 의지와 근면・검소・절약하는 정신이 소멸되었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탈렌트나 가수가 등장하면 괴성을 지르며 미친 사람처럼 변하고 있으며, 등산가면 주부들이 남의 남편을 유혹하며 중년에 애인 하나 없으면 병신이라고 한다.
남녀 할 것 없이 호프집이나 노래방에서 불륜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이 나라가 소돔과 고모라성으로 전락되어 신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어떤 사람은 군대를 기피하여 군번이 없어서 출세에 지장이 많았다고 하는데 나는 졸병 군번, 장교 군번(최전방 포병부대 폭탄 운반병이었던 육군 일등병 군번과 DMZ. GOP부대에서 육군 대위 정훈 장교 군번) 합계 군번이 두 개나 되니 복 받은 사람인가봐?
가난과 절망의 한 많은 세월 속에 태어나 역동의 시대를 거치면서 군에서 졸병 2년, 장교 6년을 거쳐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출세하겠다고 복학하여 늦둥이 대학생이 되어 31세에 대학 졸업장을 받았고 늦게나마 회사에 말단 수습사원으로 취직하여 하나님이 주신 아들 셋과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연희동 산 5번지 판자집에 월세를 살면서 남들처럼 잘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며 살아왔다.
고시촌에 기숙하면서 국가고시 준비를 하던지 석박사 학위 준비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처자식을 부양해야 하는데 고아 출신인 나에겐 돈은 전혀 없고 군대에서 8년 동안 청춘을 다 보내고 사회에 늦게 진출하고 보니 애로사항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아내는 어린 두 아들을 등에 업고 손에 잡고 신촌 로타리에서 가마니를 깔고 신발을 팔다가 도로 교통법 위반으로 파출소로 끌려가기도 했고 신문지를 모아 봉투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고 두부와 콩나물을 사서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유치원에 못다닌 아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한글 받아쓰기 시험이 빵점이 나왔고 아들은 혼자 울다가 눈이 부어 파랗게 멍이 들었다.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내가 무슨 놈의 정치를 하겠다고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나왔을까?… 오히려 처음부터 서울사대라도 나왔으면 교장선생님이라도 되었겠지…
차라리 데모도 하지 않고 군대를 기피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였거나 박사학위를 받았다면 승승장구 출세하여 부잣집 딸과 결혼하고 미국에 이민 가서 귀족 행세를 하면서 목에 힘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도 출세 못한 나의 변명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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