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학과 중퇴
돈도 없고 빽도 없는 고아 출신인 내가 12시간이 걸리는 서울행 야간 완행 열차 입석표를 사서 난생 처음 기차를 타고 낯선 서울역에 내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한 재학중인 친구 하숙집을 찾아가서 2년 동안 신세를 지면서 하숙밥을 나누어 먹고 이불을 같이 덮고 잤으니 친구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청년의 야망이었을까? 근거없는 신앙의 장난이었나?
한 친구는 훗날 사업가가 된 김경호(金敬浩), 또 한 친구는 훗날 해병대 사령관이 된 전도봉(全道奉)장군이다.
대학교에 입학금을 납부하러 갔으나 그 당시 화폐 가치로 1만 3천원인데(하숙비가 1인 독실이 3,500원/2인 1실은 3,000원/버스는 3원, 전차는 2원50전이던 시절이다) 입학금 마감시간인데 3천원이 모자라서 등록이 안된다고 하니 얼마나 난감하랴? 눈 앞이 캄캄하였다. 고민하고 있는데 언젠가 부산에 특별 강연을 하러 오신 역사학자 홍이섭 박사님이 마침 재무과 옆을 지나가고 계셨다.
나는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홍박사님을 붙잡고 아는채 하면서 3천원 보증을 서 달라고 애원하였다. 나는 천만 다행으로 입학금을 납부할 수 있었고 나중에 재무과에 3천원은 상환하였으나 훗날 홍이섭 박사님께서 연탄가스 사건으로 이 세상을 하직하였으나 나는 은혜도 갚지 못하여 지금도 나의 가슴 속 깊이 죄송함이 남아 있는 것이다.
친구의 하숙밥을 뺐아 먹기도 했고, 연대 앞 신촌 기차역 굴다리 밑 판자촌 하숙집 황해도 출신 아주머니에게 하숙비가 밀린채 갚지도 못하고 이화여대 불문과에 재학중이었던 그 분의 따님의 리포트 숙제는 가끔 내가 대신해 준 일은 있지만 끝내 밀린 하숙비를 갚지 못했으니 지금도 나의 가슴 속에 아픈 추억으로 남아 있다. 1965년 한・일 불평등 조약이 체결되었고(국무총리 김종필, 외무장관 이동원) 나를 포함한 수많은 학생들은 거리에 나가서 한일회담 반대 데모에 열중하였고 단식투쟁, 가두시위 등으로 사회는 어수선 하였고 최루탄 냄새가 서울 시가지를 뒤덮고 있었다. 북아현동 굴레방 다리를 지나 종로로 진출하여 청와대까지 진출하여 경찰과 학생의 공방전은 치열하였다.
학교 수업은 파행적이었고 수시로 휴강이 되었다.
휴전선에서 청춘을 보내고
청석tr
1965년 12월 나는 학교를 중퇴하고 39사단으로 징집되었다. 1966년 1월27일 육군 이등병 병기 탄약운반병으로 병기학교를 거쳐 ○○사단 977포병대대로 배치되었다. 한탄강·임진강을 건너 영하 20도의 전방부대로 발령났다.
육군 병기학교에서 교육 기간 중 고참병들의 횡포는 대단하였다. 점호가 끝나고 밤 10시에 취침하면 새벽 1시까지 고참 병사들이 와서 원산폭격 · 한강 철교m·m야전삽으로 구타하기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횡포를 부렸다. 술값을 걷어주면 기압이 부드러워지기도 했다.
훈련소를 졸업할 때 모두들 가족들이 찰떡을 해와서 즐겼지만 고아 출신인 나에게는 아무도 찾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병기학교에 와서 이렇게 비참한 지옥 생활을 감수해야 하니 나의 가슴 속에는 불타는 복수심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부대 배치 후에도 졸병 시절 고참병들로부터 많이 얻어맞았다. R.O.T.C 출신이건 육군사관학교 출신이건 젊은 소대장(육군 소위)들은 최전방에 배치된 병사들의 고독한 마음을 잘 헤아려주지 못했다. 나는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국민의 군대로서 군에 온 것인데 부당하게 구타당하면서 누구의 노예가 되기 위하여 군대에 온 것이 아니다. 돈 많고 빽 있고 사회적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나 자식들 중에 과연 최전방에서 군대생활을 하는 자가 있는지? 병역의 의무나 제대로 하였는지 묻고 싶다.
6 25 한국전쟁 시 이름 모르는 계곡에서 녹슨 철모 밑에 숨져간 호국 영령들은 과연 누구였던가? 가난한 농민의 자식이 아니었던가? 나는 갑자기 가슴 속에 증오와 복수심이 불타고 있었다. 그런데 복수의 대상을 누구로 하느냐가 연구 대상이었다.
현재 나는 젊음이 있기 때문에 참고 견디는 것이 일차적 과제였다. 말단 사병 생활은 도저히 나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았다. 최전방에서 탄약 운반병을 그만두고 1967년 육군 일등병으로 육군 간부 후보생을 지원하였다. 사병으로 제대하고 고향에 돌아가봤자 밥 한 그릇 줄 사람도 없고, 잠 잘 곳도 없고 대학 생활을 계속한다는 보장이 없는 나는 고민 끝에 육군 장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육군보병학교 ·육군포병학교 · 육군정훈학교를 수료하고 1968년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최전방 GOP부대 DMZ에서 청춘을 보냈다. 육군 대위로 진급하여 정훈 장교로 근무하던 중 1973년 11월 30일 군대생활을 청산하고 대학에 복학하여 젊은이들과 함께 1976년 대학을 졸업하였다.
군대에서 나는 왜 청춘을 보냈을까? 육군 중위 때 결혼하여 최전방을 돌아다니면서 나의 아내는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지 모른다. 결혼 후 35년 동안 월세 · 전세 이삿짐을 18회나 쌌으니 이삿짐 싸는데 도사가 되었다. 결혼 때 냉장고는 녹이 슬고 밑받침이 다 부식되어 20년 만에 교환하니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결혼한 지 35년이 되었는데 사기꾼 · 도둑놈 ·놈팽이도 타고 다니는 그렇게 흔해빠진 승용차 한 대도 없으세요?” 아들이 물었다. “아들아, 우리나라는 기름 한 방울도 생산되지 않는데 월급쟁이가 무슨 놈의 자가용이냐? 아버지는 부모님이 주신 튼튼한 다리가 있으며 그것도 군대 생활 8년 동안 더욱 튼튼하게 훈련된 두 개의 정상적인 다리가 있으니 가장 좋은 11호차가 아버지의 자가용이란다. 그뿐만 아니라 지하철·버스가 얼마나 많으냐? 우리나라는 행복한 나라야…… 자가용이 없으니 남보다 더욱 부지런하고 걸어 다니니 얼마나 건강하니?
아버지는 이제 60회갑이 지났지만 시력이 1.0에 안경도 없이 신문도 읽는다, 직장에서 퇴근하면 수시로 뒷산에 올라가 산책을 즐기며 거짓말 할 줄 모르는 나무와 바위와 대화를 나눈다. 하산할 때 재래시장에 가서 막걸리에 두부 김치를 먹으니 그것이 보약이 아니더냐? 아들아…….”
그러고 보니 어떤 사람은 군대를 기피하여 군번이 없어서 출세에 지장이 많았다고 하는데 나는 졸병 군번 · 장교 군번(육군 일등병 군번과 육군 대위 정훈 장교 군번) 합계 군번이 두 개나 되니 복 받은 사람인가 봐?
가난과 절망의 한 많은 세월 속에 태어나 역동의 시대를 거치면서 군에서 졸병 2년, 장교 6년을 거쳐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출세하겠다고 복학하여 늦둥이 대학생이 되어 31세에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늦게나마 회사에 말단 사원으로 취직하여 하나님이 주신 아들 셋과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연희동 산 5번지 판잣집에 월세를 살면서 아들 셋을 키우면서 남들처럼 잘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며 살아왔다.
사회에 늦게 진출하고 보니 애로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내는 어린 두 아들을 등에 업고 손에 잡고 신촌로터리에서 가마니를 깔고 신발을 팔다가 도로 교통법 위반으로 파출소로 끌려가기도 했다. 신문지를 모아 봉투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고 두부와 콩나물을 사서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유치원에 못 다닌 아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한글 받아쓰기 시험이 빵점이 나왔고 아들은 혼자 울다가 눈이 부어 파랗게 멍이 들었다. 훗날 큰아들은 연세대학교를 나와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고맙다. 아들아…….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내가 무슨 놈의 정치를 하겠다고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나왔을까?… 오히려 서울사대라도 나왔으면 교장선생님이라도 되었겠지…….
차라리 군대를 기피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였거나 박사학위를 받았다면 출세하여 미국에 이민 가서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면서 목에 힘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모두 다 출세하지 못한 자의 변명에 불과하다. 출세하지 못하고 경쟁에 뒤진 패배자의 슬픔을 누가 알아주리…….
배부른 자는 배고픈 자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며 승리자는 패배자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승리하고 성공하고 출세한 자들이여 그대들은 얼마나 돈을 벌었으며,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가? 얼마나 이 세상에 공헌하였는가……. 강자의 미사일 공격에 대량으로 죽어가는 약자들은 테러리즘의 폭탄을 안고 피투성이가 되어가는구나…….
'우리들의 이야기 > 자유게시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늦둥이 교직 생활 (0) | 2023.03.30 |
---|---|
만학도의 슬픔과 수습사원 (0) | 2023.03.30 |
오늘의 기도문 (0) | 2023.03.09 |
노원 문인협회의 추억 편집 (0) | 2023.03.04 |
과거를 묻지마오 (0) | 2023.02.17 |